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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스런 제주

세계최강 몽골에 대항한 고려인, 최후 항전지

by 광제 2008.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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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최강 몽골에 대항한 고려인, 최후 항전지

-외세와 결탁하려는 조정에 민중항쟁으로 맞선 조국수호의 현장-

당시 세계최강국 몽골의 원제국과 맞서 끝까지 항쟁을 벌인 고려무인의 드높은 기상을 오늘의 후손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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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77년전이다. 1231년부터 42년간 지속된 전쟁을 70명의 목숨으로서 1273년에 끝맺음을 한 민족적인 한이 서린 곳이 있다. 외세와 결탁하려는 조정과는 함께 할수 없다며 투쟁을 선언한 삼별초군이 고려조정과 몽고군이 합세한 여.몽 연합군에 의해 전원이 전사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이며 삼별초군의 최후의 근거지이다. 그 역사의 현장속으로 들어가 외세에 목숨으로서 대항하여 조국을 지키려 했던 우리 선조들의 얼을 마음으로 느껴보자.

삼별초(三別抄), 고려고종때 도적을 잡기위하여 최우가 ‘야별초’라는 이름으로 군대를 신설하였으니 지금으로 보면 경찰이라 보면 맞을 듯 싶다. 전투능력을 갖췄으니 전투경찰이라 봐도 무방할 듯 싶다.

그 뒤에 야별초의 군사의 수가 많아져 두개로 분리를 했는데 좌별초와 우별초다. 여기에 신의군을 합쳐 삼별초라는 군대가 탄생하였다. 신의군은 최우의 무신정권(1219-1259)때 몽골군이 고려에 칩입하여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한 고려군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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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이 사용하였던 오방기와 삼별초군의 부대기이다. 북쪽을 나타내는 검정기, 남쪽을 나타내는 붉은색기, 중앙을 나타내는 노란색기, 서쪽을 나타내는 하얀색기, 동쪽을 나태내는 푸른색기
이렇게 조정의 주축 군대였던 삼별초가 어떻게 조정에 반기를 들었을까? 바로 무신정권의 몰락이었다.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침략으로 몸살을 앓던 고려의 무신정권은 1259년 최우의 죽음으로 인하여 몰락하고 새로운 문신정권(원종)은 몽골과의 화친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이에 몽골과의 화친을 반대하는 많은 백성들의 호응을 등에 업은 삼별초의 총사령관 배중손은 조정과 몽골에 항전하기로 결의한다. 이렇게 민중의 호응속에 시작된 투쟁이 ‘삼별초의항몽투쟁’이다.

<자신들을 억압한 국가의 군대와 정면으로 맞선 영웅>

강화도에서 시작된 항쟁은 진도에 본거지를 두고 용장성을 짓고 새정부까지 구성한다. 진도에서 세력을 떨치던 삼별초는 1271년 고려조정의 김방경과 몽골사령관 흔도가 이끄는 연합군에 의해 용장성이 함락되고 삼별초 사령관 배중손이 전사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삼별초군은 김통정 장군의 지휘아래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이때가 고려원종12년(127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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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가 진도에서 밀려 근거지를 제주도로 옮기면서 김통정장군이 몽골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이 곳에 지은 토성이다. 길이가 6km에 달하며 내성과 외성으로된 이중성이다. 내성은 돌로 쌓은 석성이며 외성은 사진과 같은 토성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토성의 길이는 1.4km이다. 당시 이 성안에는 여러가지 관아와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강화도와 진도를 거쳐온 개경의 관리와 그 가족들과 삼별초의 장병들이 기거하여 이 성은 망명정부의 수도와도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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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파두성을 축성하고 있는 모습, 제주도를 항쟁의 거점으로 삼은 삼별초군은  적의 상륙예상지인 함덕포와 병월포의 중간지역인 이 곳에 토성을 쌓아 근거지로 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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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가 항파두리에 웅거할 때 김통정 장군을 위시하여 귀족계급들이 음료수로 사용했던 샘물인 옹성물(왼쪽)과 성밖 서민 및 병사들의 음료수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구시물이다. 지금까지도 이렇게 맑은 샘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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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을 세우면서 기둥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돌쩌귀이다. 그리고 오른쪽은 바위로된 훈련용 과녁이고 가운데 구멍은 화살촉이 박혔던 흔적이다.('살맞은 돌'이라 부른다) 박혀 있던 화살촉은 40여년전까지만해도 있었는데 어느날 사라졌다고 한다.

<몽골(蒙古)에 맞서 끝까지 항거한 고려무인의 정기가 서린 삼별초군의 마지막 보루(堡壘) >

제주도에 근거지를 두고 항전을 계속하던 삼별초는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남해안 일대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김통정장군은 제주민중과의 유대를 강화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삼별초는 제주도에 주둔하면서 일체의 돈과 쌀을 받지 않고 조세선을 포탈하여 그들의 군비를 충당하였다. 즉, 그들의 군대 유지를 위해 제주인들을 수탈하거나 착취하지 않은 것이다.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제주인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억압했던 국가의 군대와 정면으로 맞서는 김통정장군을 자신들을 구원하고 새로운 세상을 구현할 민중 영웅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던 1273년 군선 160척과 군사 일만을 거느린 여.몽 연합군의 공격을 받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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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3년 4월28일 군선 160척과 1만의 군사를 거느린 여.몽 연합군은 함덕포구와 비양도로 상륙하게된다. 그림은 함덕포구에서의 치열한 전투 장면이다. 그러나 삼별초의 초라한 군사력은 연합군에 당해 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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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남은 70여명의 군사들이 최후의 일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삼별초군은 항파두성에서 결렬한 방어전을 폈으나 군사력의 열세로 패하고 남아있던 부장급 70여명은 항파두성을 탈출하여 인근의 붉은 오름에서 최후의 혈전을 벌여 모두 장렬히 전사한다.  홀로 남은 김통정 장군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자결한다. 최후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고 피로 물들여 졌는지는 오름의 이름이 붉은오름이라 불리게 된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하고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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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통정장군이 탈출할때 몸을 날리면서 발을 디딘 곳에 이렇게 패여 샘물이 솟아 났다고 하여 '장수물'이라 부른다. 언제나 물이 모자라는 제주의 백성들 물이라도 실컷 먹으라는 장군의 마지막 선물인듯 싶다. 사시사철 어떠한 가뭄이 닥쳐도 절대로 마르는 일이 없다.

결국 최후에 남은 70여명의 군사들이 끝까지 항전을 하다가 한명도 남김없이 여.몽연합군의 손에 죽게 된다.
비록 몽고군을 물리치진 못했으나 그들의 독자적인 무력 항몽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려는 호국충정의 발로로서 고려인의 자주 정신을 보여준 계기와 함께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다. 삼별초의 항쟁을 끝으로 고려는 몽골의 원(元)제국의 지배를 받는 참담한 시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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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군을 섬멸시킨 몽골은 철수하기는 커녕 총관부를 설치하고 군사를 주둔시켜 제주도를 몽골의 직속령으로 만들어 1세기 동안 지배했다. 몽골이 지배하는 동안 제주양민들은 수 많은 공물을 해마다 바쳤으며 몽골의 일본정벌을 위한 목마장을 설치하여 군마를 기르고 산야의 나무를 베어 함선을 건조하는등 어려운 군역에 제주도민들이 동원되어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다.

<제주민중의 신으로 불려졌던 김통정>
 제주 역사상 유일한 현실의 장수를 만났던 제주인, 그들은 그의 죽음과 패배에 안타까워하고 자신들의 좌절된 꿈을 그리워하며 그를 신이라 불렀다.

수탈과 핍박에 대항하여 자신들을 사지로 내몰던 국가와 맞서는 현실의 장수, 변방의 땅에 숨겨진 반역의 꿈을 잠시나마 현실화시켜주었던 희망의 장수 김통정 장군, 그가 건설한 피안의 해상왕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꿈을 또다시 접어야만 했던 좌절과 실패의 역사를 제주인들은 이렇게 신으로서 붙잡고 있다.

이후 100년동안 몽골인들에게 이루 말 할수 없는 고초를 겪던 제주도민들, 그 고난의 세월은 고려공민왕23년(1374년) 최영(崔營)장군에 의해 몽골인들이 완전히 토벌될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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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도통사 최영장군에 의해 토벌된 몽골세력 당시 최영은 전함 3백14척에 2만5
천의 대군단을 이끌고 명월진으로 상륙하여 몽골군을 격멸하고 서귀포 범섬까지 달아나는 몽골군의 수괴를 쫓아가 섬멸하였다. 이로서 몽골 100년의 지배는 종식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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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파두성 안에서 발견된 당시 고려인들이 사용하던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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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녁으로 사용되었던 지금까지도 화살촉이 박혀있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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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몽순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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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인물인 김통정의 전설>

강화군 교동면에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이 살았다. 그런데 밤마다 어떤 남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잠자리를 같이 하였다. 남자의 몸에 미리 몸에 묶어둔 실을 따라 가보니 그 남자란 것이 바로 문밖 노둣돌 아래 사는 지렁이었다.

이렇게 낳은 아기는 온몸에 비늘이 돋아있고 겨드랑이에는 자그마한 날개가 달려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지렁이(蚓)와 정(精)을 통(通)해 낳았다 하여 '진통정'이라 불렀으나, 후일 아이의 비범함을 탐낸 이웃의 김씨 가에서 '진'과 '김'이 비슷하다 하여 김씨로 바꿔 김통정이 되었다.

김통정은 자라면서 활을 잘 쏘고 하늘을 날며 도술을 부릴 줄 알았으며 나중에 커서는 삼별초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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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몽유적지 정보

종   목   국가사적 396호
명   칭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
분   류   기타유적지
면   적   1,135,476㎡
지정일   1997.04.18
소재지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1126-1외
소유자   국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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