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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어버이날만 되면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by 광제 2009.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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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집안의 큰 기둥이셨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

늘 해마다 다가오는 '어버이날'입니다. 올해 서른 일곱번째를 맞고 있는데요,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에 '어버이날'이 생겨났습니다. 그전에는 '어머니날'이었죠. 기록에 보니 '어머니날'은 1956년 부터 매년 5월8일에 17회인 1972년까지 시행 됐었네요. 예전 '어머니날'에는 '아버지가 많이 섭섭하겠구나' 라는 말이 오갔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거나 나중이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를 지칭하는 '어버이날'로 명칭이 바뀌었으니 다행이지만 필자의 아버지께서는 그다지 '어버이날'에 대한 재미(?)를 못보셨습니다.


모든 형식을 다 갖춰 '어버이날'에 축하와 공경속에 오붓한 시간을 갖었던 추억이 있는 가정에서는 실감이 나지 않을지 모를일이지만, 필자의 어린시절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에게 이렇다 할 선물은 고사하고 카네이션 한송이 달아 드린적도 몇번 안된 것 같습니다. 어린이 날이든, 어버이 날이든, 이것저것 다 챙기면서 살만한 기본적인 여유 조차도 없는 삶을 필자의 부모님들은 사셨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어린시절 가정에는 가장 윗분으로 할머니가 계셨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비록 어려운 가정 형편이었지만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고 폐끼치는 일 없이 살아가던 어느해, 장손이었던 필자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해였습니다.  살아가면서 무슨 걱정을 그리 안고 사셨는지 모르지만 평소 술과 담배를 자주 하시던 어버지께서 위궤양으로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어버지 연세, 60세도 되시기 전에 장남이 갓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그 밑으로 어린 자식들을 두고 떠나실려니 눈이라도 제대로 감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던 날, 온가족이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었지만, 오직 한분만은 애써 슬픔을 감추던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필자의 할머니셨습니다. 자식이 당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아니면 애써 부정하고 싶으신 듯, 들고 계신 지팡이로 흙마당의 한켠을 하루 종일 훓고 계셨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몇년이 지난 후에야 안 사실이지만 할머니께서는 아들이신 필자의 아버지께는 남다른 서운함을 갖고 계셨던 겁니다.


할아버지께서 아버지께 물려주신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이런저런 사업 실패로 날려버리고 난 후, 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냉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한참이나 지난 이후에 알았고, 이런 이유가 할머니의 손자들인 필자의 형제들에게 모진 훈계와 회초리를 들게 한 이유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손자들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되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조차 겪어보지 못한 호된 야단과 호통을 할머니에게서 들으면서 학창시절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에야 느낀 사실이지만, 어버지가 실패를 한 이유가 할머니, 당신께서 아들 교육을 잘못 시킨 탓이라 생각하고 계셨던 겁니다. 사업실패로 위궤양까지 병을 안고 당신보다 먼저 떠난 사랑하는 자식이 얼마나 미웠을까요. 늘 하시던 말씀이 '니네들 아버지를 모질게 못 키운게 한이다.' 라고 하셨을 정도이니 잘못 꼬여 버린 현실을 모두가 당신탓으로만 돌리셨던 겁니다.


그러한 할머니의 뜻을 성인이 된후에야 비로소 느끼고 해마다 어버이날만 되면 아버지가 달아드리지 못했던 카네이션을 필자와 손자들이 달아드렸습니다. 손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어머니보다 더 챙기셨던 할머니, 당신의 아들이 밟았던 전철을 손자들은 밟게 하지 않겠다던 할머니, 비록 지금은 몇십년이 지나 할머니께서도 어머니께서 이세상분이 아니지만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가슴이 미어지도록 생각나는 할머니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근엄했던 모습보다 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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