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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오십 원 때문에 울고 웃었던 35년 전 사연

by 광제 2009.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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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원 때문에 울고 웃었던 35년 전 사연

신종플루 때문에 가을소풍을 못 가게 되었던 딸애가 고대하던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딸애가 다니는 학교의 전체 학년 중 2학년에만 확진환자가 발생하여 제외되었었는데, 그 때 못 갔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별도의 소풍을 다녀왔는데요, 기대했던 소풍을 못가는 줄 알았던 딸애의 얼굴에는 그나마 생기가 돌고 있습니다. 소풍을 다녀오는 딸애를 보니 35년 전 소풍에 얽혔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에는 저희 집이 이렇게 가난한줄 몰랐습니다. 아니 입학하고 나서도 얼마동안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른 애들과 다를 바 없이 어깨에는 새 가방을 짊어졌고 가슴에는 하얀 손수건까지 보란 듯이 매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입학식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다만 허전했던 것이 있다면 저는 혼자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입학식을 지켜보던 다른 애들과는 달랐던 한 가지가 저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대신 2학년 선배인 누나의 손을 잡고 첫 등교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입학식을 치르고 있었던 그 시간에 저희 부모님께서는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들 녀석이 처음 학교에 가는 날, 큰맘 먹고 가방과 손수건까지 세련되게 챙겨 주고는 학교를 보냈지만, 그 자리까지 함께 할 수 없었던 부모님의 마음은 몸집이 훌쩍 커버린 후에나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소풍가는 날 아침입니다. 마당에 나와 보니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게 합니다. 짚을 태워 밥을 짓던 아궁이에서 어머니가 고등어를 굽고 있습니다. 소풍날 도시락 반찬임이 분명해보였습니다. 입안의 마른침을 삼키며 바깥채에 딸린 부엌으로 들어가 보니 다 익은 고등어에 묻어있는 재를 정성스럽게 털어내고 계셨습니다. 어시장까지 가려면 한참인데, 언제 다녀오셨는지 소풍반찬으로 고등어를 사오신겁니다. 그 고등어를 타다 남은 짚 위에 올려놓고 구우시니 당연히 재가 묻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왜 고기 굽는 석쇠가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습니다.

누나와 나, 두개의 도시락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한껏 멋을 들였습니다. 늘 먹었던 밥이 아닙니다. 거칠고 밥맛이 없었던 누런 조밥위에 보리알이 하나둘 얹혀져 제법 맛있고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평상시 먹는 밥에는 하얀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100% 누런 조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멋을 낸 밥과 구수한 고등어구이, 설레는 마음으로 가방에 집어넣은 우리 둘은 아버지께로 다가갔습니다. 과자를 사가라고 돈을 주실 모양입니다.

꼬깃꼬깃 넣어 두셨던 지폐를 두장 꺼내 놓으십니다. 오십원짜리 두장입니다. 횡재했습니다. 거금을 손에 넣는 순간입니다. 나가는 길에 구멍가게에 들러 먹고 싶은 것을 사서 가방에 넣고 가랍니다. 누나와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가게로 달려갑니다. 사고 싶은 것 마음대로 살 수는 없어도 그래도 그동안 먹고 싶었던 과자들을 가방에 쑤셔 넣고는 소풍 길을 떠납니다. 학교에 입학을 하고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이 바로 소풍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냥 행복(?)이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해 가을이었는지, 아니면 이듬해였는지는 모르지만 소풍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우리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어버지께 들어야 했습니다. 소풍을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과자값으로 줄 돈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이유 때문에 한참을 소리 없이 울어야 했지만 소풍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울고 있는 우리 둘이 안쓰러웠는지 아버지 몰래 도시락을 준비해 줍니다. 예전처럼 구수한 고등어구이는 없었지만 평상시 먹던 그대로를 싸들고 소풍 길을 나섰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 이후로는 소풍을 거르는 일은 없었습니다. 잘사는 집 애들처럼 가방 가득히 먹을 것을 싸들고 다니지는 못했지만 꿈에나 먹어봄직한 김밥이라는 것도 소풍 때라야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요즘의 어린이들 생활상과는 많이 달라서 당시 초등학교 생활에서 소풍과 가을 운동회를 빼고 나면 아무런 낙이 없습니다.

조금 형편이 나았던 가정에서는 100원 정도의 과자값을, 그리고 친구 중에는 아주 잘 살았던 조합장을 지내던 집안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녀석은 300원어치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먹을 것을 싸들고 다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몇 년이 흘러 고학년이 되고서야 100원의 과자값을 들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화폐가치와 비교하여 70년대 초 당시의 100원이라는 돈이 얼마나 큰 금액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돈이 없어 소풍을 포기했어야 할 만큼 가난했던 잊혀지지 않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신종플루 때문에 소풍이 좌지우지 되고 그에 따라 표정이 오락가락 하는 딸애를 이제는 부모 된 입장에서 바라보니, 당시에 100원이 없어 소풍을 가지 말라고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얼마 전 신종플루 때문에 소풍을 가지 못하게 되자 속상해 하는 딸애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저의 마음, 그 마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찢어지도록 가난했던 그때의 가정형편보다도 더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과자값이 없어도, 소풍가방이 썰렁했어도 아버지가 같이 계실 때가 가슴 저미도록 행복했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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