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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양변기물로 양치질 했던 웃지 못 할 사연

by 광제 2009.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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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변기물로 양치질 했던 웃지 못 할 사연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날씨였습니다. 간밤에는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천지를 뒤흔들어 밤잠을 설치게 하였는데요, 간간히 빗줄기가 굵어 질 때면 행여 물난리가 나지 않을 까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보면 가끔 뇌리를 스쳐가는 20년 전의 웃지 못 할 기억이 떠오릅니다.
 
1989년 여름이었으니 정확히 20년 전입니다. 직장 초년병인 저는 서울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도입하는 첨단 시스템에 대한 유지 보수 교육 때문이었는데, 무려 일주일에 걸친 비교적 장기출장이었습니다. 교육도 교육이지만 제주도에서 서울로 출장을 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편으론 가슴이 설레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 촌놈, 서울구경인 셈이었죠.

하지만 김포공항에 발을 디딘 첫날부터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의 지리에 대해 전혀 몰랐던 저는 버스에 몸을 실은 이후에도 급박하게 전해지는 버스의 안내방송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강의 물이 급격하게 불어나는 바람에 이동경로를 우회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요즘에는 제주에서도 무분별한 개발 때문에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비 피해는 여간해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곳이 제주도입니다. 강풍에 의한 피해는 간혹 있었지만 비가내리면 자연적으로 바다로 쓸려 내려가게 되어 있는 지형적인 특징으로 홍수 피해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서울에서 본 범람한 한강, 그리고 차량들이 떠내려가는 모습은 별천지를 보는 듯하였습니다.

예정보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교육장, 어찌어찌 첫날 일정을 마치고 들어선 숙소, 숙소는 다름 아닌 여관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구색이 갖춰진 장급여관이었습니다. 짐을 풀고는 씻으려고 욕실로 들어가서 수돗물을 틀었는데, 물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너무 황당하여 주인아주머니께 여쭤봤습니다. 여관에서 물이 나오진 않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올림픽까지 치러낸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겁니까? 물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강이 범람하면 상수도 관리차원에서 물을 차단한다는 것'이 아주머니의 설명이었습니다. 얘기를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지만 제주도에서는 경험 못했던 일이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씻지도 못한 채 그냥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사태(?)가 아침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이른 아침, 당연히 수돗물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씻으러 들어간 욕실에서는 아직도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난감한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씻지도 못한 채 서울에서의 첫날을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얼굴이야 대충 눈꼽만 떼어내면 그만이지만 양치질이 가장 문제였습니다. 텁텁한 입안을 시원하게 씻었으면 좋겠는데, 물이 나오지 않아 어떡할까 궁리를 하던 중 눈길이 향한 곳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양변기 뒤편에 있는 물통입니다. 조그마한 저장 탱크인데, 변기에 사용할 1회분의 물을 보관하고 있는 곳입니다. 도기로 된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보니 다행히 물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변기통에 들어 있는 물이긴 하나 수돗물을 바로 받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깨끗한 물입니다. 양치질 하는데 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욕실에 비치 된 컵으로 물을 떠서는 양치질을 마치고 방을 나섰지만 서울에서의 첫날밤 신세가 참으로 기구합니다. 양변기의 물을 떠서 양치질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뭐, 당시로서는 '서울이라 하여 사람이 살기 좋은 곳만은 아니구나.' 라는 현실을 깨달았지만 말입니다. 지금도 집중호우만 내리면 생각나는 양변기 양치질, 혹시 지금도 집중호우가 내리면 수돗물을 잠궈 버리진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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