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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만사

강제노역 아버지의 恨, 가슴에 묻은 삶

by 광제 2010.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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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노역 아버지의 恨, 가슴에 묻은 삶

-일제의 강제노역에 맺힌 한, 역사의 현장에 일생 바쳐-

"사람의 얼굴이 다르듯 모두가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싸우지 않고 평화를 지키려면 힘을 길러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고 또한 과거가 묻혀져서도 안 된다. 나에게 그 세상에서 젊은 날을 다시 한번 살라고 하면  차라리 죽고 말 것이다." 90세의 노부가 이제 환갑을 눈앞에 둔 아들을 앞에 두고 얼굴위로 쏟아져 내리는 피눈물을 닦아내며 하는 말입니다.

이제 90으로 접어드는 아버지는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2년 전인 1943년 초 일본군의 총칼에 끌려갑니다. 당시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끌려간 곳은 인근에 있는 '가마오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일본이 패망하여 완전히 철수하기까지의 2년 반이란 세월동안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먹을 것도 없이 곡괭이와 삽만을 가지고 쉬지 않고 땅굴을 팠습니다. 일본군들은 이미 기력이 다한 양민들을 채찍으로 후려치며 킬킬 웃어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환자가 생기면 치료를 해 준다고 어디론가 데려가면 두 번 다시 그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는 한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본군의 진지땅굴에 희생됐던 수많은 제주양민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인 1963년 당시 열 살이던 철모르는 소년이 친구들과 함께 가마오름 일대에 일본군이 파놨다는 땅굴 속으로 호기심을 안고 들어가게 됩니다. 끝이 보이지 않고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땅굴 속에서 길을 잃게 되고 불을 밝히려고 갖고 들어갔던 짚도 이미 다 소진되고 급기야는 신고 있던 고무신까지 태우며 불을 밝혀야만 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수소문 끝에 찾아 나선 후에야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빠져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두 번 다시는 절대 들어가지 말거라. 자칫하면 죽어 인석아~!"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아픈 현장을 아들을 구하려고 20년 만에 찾았던 것입니다.

아버지, 그리고 마을어른들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가마오름 땅굴의 존재를 이 무렵에 알아차린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된 암울했던 시기에 속 시원히 드러내지 못한 채 기나긴 세월동안 가슴 속에만 품고 살아야했습니다. 가난했던 시절에 일제의 아픔을 겪다보니 가정이 온전할 리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소년은 3남3녀의 장남이었기에 독한마음을 먹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중학교에 들어갈 형편이 안 되어 시작된 학교의 급사일. 이 일을 하여 받은 보수가 한달에 3천 원가량, 이 돈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중학교의 학비를 충당하게 됩니다. 당시 중학교의 학비는 1분기에 4천5백 원 정도였으니 보수의 절반이 학비로 나간 것입니다. 급사 일을 하며 학교공부를 해야 했던 소년은 이마저도 모자라 틈틈이 나무를 해서 등에 지고는 수 십 킬로를 걸어 내다팔기도 했습니다. 고산에서 모슬포까지 등에 지고 나르다 보면 등이 다 벗겨지기가 일쑤, 바로 이때 화물차를 운전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시작된 자동차와의 인연은 당시 최연소(만18세 1개월)로 제주도내에서는 전체 1431번째로 운전면허에 합격하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그 후 화물차를 운전하고 제주도내의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일제에 의한 아픈 역사의 흔적들을 여실히 느끼게 됩니다. 제주도내의 전망이 좋은 오름들에는 죄다 땅굴로 뚫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소년의 나이는 어느덧 40. 아픈 역사의 산증인이었던 아버지는 비로소 아들에게 땅굴의 내력과 일제에 의한 잔혹한 참상을 자세히 털어놓게 됩니다.

가마오름일대 거미줄처럼 얽혀진 땅굴, 붉은 부분은 현재 개방중

바로 이때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일제의 악몽이 자리 잡게 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상에 이일을 알려야 했던 것입니다. 최소한 두 번 다시는 이 땅에 이러한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어선 안 된다는 일념하나 만큼은 확고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가지 신념으로 매달린 끝에 차곡차곡 마련한 재산. 화물차를 운전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다시 화물차를 한대씩 사들이고 나중에는 관광버스도 사들이게 됩니다.

한 가지 일념으로 매달린 끝에 결국 1996년에 자신이 갖고 있던 전 재산을 팔고 더러는 대출을 받아가며 46억원이란 돈을 들여 가마오름 일대 1만2천 평을 사들입니다. 일제당시 추산 약5천명의 도민들, 그리고 충남금산에서 강제로 잡혀온 사람이 250여명 등 전국각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죽어갔던 거미줄 같은 땅굴이 있는 그곳, 가마오름을 말입니다. 물론 자신의 부친도 21살 때부터 이들과 같이 2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린 곳이기도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주의 오름 중 한 곳처럼 평화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미 오름 속 땅 밑에는 양민들의 아우성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은 땅굴이 아픈 세월과 함께 거미줄처럼 그대로 얽혀 있는 곳입니다. 그는 이곳 가마오름을 사들이면서 박물관으로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를 알리려는 계획을 주변에 알리게 됩니다.
 
"저놈이 미쳤다!"

전세버스를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수 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 재산을 털어 쓸모없는 땅을 사들이고 땅굴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과연 어떤 방법으로 알릴 것인지 조차도 불확실한 상황, 그리고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이라는 오해를 비롯한 주변의 거센 목소리가 합해져 그를 두고 '미쳤다'는 한마디로 손가락질을 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미친 짓(?)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집안의 창고에 쌓아 뒀던 잡동사니를 죄다 꺼내고 이사철에는 남의 집 앞에서 쓰레기더미까지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물을 수집하기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일제당시에 일본군이 사용했던 군복과 물통, 탄약상자, 수류탄, 포차바퀴, 각반, 측량기, 그리고 내무반에 걸어 놓았던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 휘호까지 수집하기에 이릅니다. 유물도 중요하지만 당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던 노인들의 증언도 필요하여 약200명으로부터 증언을 듣고 60시간가량의 영상물도 만들어냈습니다.


발로 뛰어 모아 놓은 온갖 유물들과 자료
 
국가기록원을 방문하여 살다시피 하며 자료를 검토하고 이 중 박물관 건립에 유용한 자료라고 판단이 되면 공식적으로 대여해 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박물관 건립 허가를 받는데 만도 무려 2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정작 팔을 걷어 부치고 매진해야 할 행정관청이 ‘관보다 민이 앞선다.’는 이유만으로 제동을걸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 하지만 이에 한 치의 굴함도 없이 밤낮으로 뛴 끝에 결국 2004년 5월12일 '가마오름 평화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정식등록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곳의 대표가 바로 '이영근 관장'입니다.

개관을 하였지만 이를 널리 알리는 것 또한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습니다. 한번 눈 밖에 난 도정의 협조가 전무한 상태에서 박물관을 널리 알리려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 뛰었습니다. 교육적으로 소중한 가치가 있기에 전국의 수학여행단과 심지어 일본에까지 건너가 양국의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소망하며 간절한 초대의 손길을 보내게 됩니다.

일본에서의 반응이 오히려 뜨거웠습니다. 일본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자신들의 선조가 행한 사건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는 분을 삭이지 못했으며, 실제 강제노역의 현장에서 군 생활 했던 노인들은 현장에서 당시의 참상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심지어는 엎드려 참회를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탓에 일본당국에서는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보내는 것에 대해 암암리에 제동을 걸어오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지난 역사의 아픔을 뒤돌아보는 소중한 교육의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은 계속하여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문화유산으로 문화재청에 등록이 되어있기 때문에 유지보수비로 제주도와 문화재청으로부터 합계 3억원의 지원을 받을 계획이지만 이는 땅굴의 유지보수에 투입되다보니 박물관 운영은 전적으로 입장객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물관을 건립하면서 받은 대출의 이자만도 한달에 무려 3천만 원. 최근 5년 동안의 누적된 적자만도 7억.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졸린 눈을 비비며 골프장 셔틀버스의 운전기사로 아르바이트를 뛰기도 합니다. 적자에 허덕이는 운영비를 조금이라도 보태지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는 "이는 사업의 개념이 아니다. 후세가 꼭 알아야할 교육이다." 라고 힘 있게 말합니다. 인터뷰 도중에 그는 문득 시계를 보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밤 10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 골프장 셔틀버스를 운행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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