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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만사

열대야의 새벽 2시에 경비실에서 연락 온 까닭

by 광제 2010.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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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 있는 인터폰이 요란하게 울린 시간은 정확히 새벽 2시였습니다. 열대야로 시달리다보니 깊게 잠이 들지 않았던 때라 벨소리를 처음부터 감지할 수 있었고 한밤중이라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잠을 설치고 있는 상태, 설상가상입니다. 약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인터폰을 받아보니 경비실입니다.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 경비실입니다."

"경비실에서 무슨 일인가요?"

한밤중에 곤히 잠들어 있을 시간인걸 알면서도 깨울 수밖에 없었던 급한 사정이 있었나 봅니다. 그 급한 사정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다름 아닌 에어컨 때문이었습니다. 아래층에 살고 있는 세대에서 에어컨의 소음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다면서 경비실로 항의전화를 한 것입니다. 아래층에는 올해 초 새롭게 이사를 와, 인사도 제대로 못했고 눈인사만 몇 번 주고받은 아직은 가깝고도 먼 이웃입니다.

에어컨을 가동하면서 문을 닫고 있어서 그랬는지 밖에 있는 실외기의 소음을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문을 열고 잠을 청하는 아래층에서는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었나 봅니다. 나 좋자고 남에게 피해는 줄 수 없어 바로 에어컨 가동을 중단하였습니다. 수십 년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한밤중에 에어컨을 가동했던 것은 손으로 꼽을 만큼 적었었고 이번 또한 그중에 한번으로 에어컨은 틀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처남부부가 일을 다니는 바람에 우리 집에서 어린 조카를 돌봐주는데, 마침 처남부부가 동료들과 회식이 있어 조카를 데리고 갈 시간이 늦어지겠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날이 밝으면 데리고 올 건데 그냥 우리 집에서 재우는 것으로 의견일치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열대야가 극성을 부리는 밤입니다.


문제는 어린조카가 더위에 아주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아토피 피부염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는데, 땀띠가 생기기 시작하면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긁기 때문에 어떤 때는 피부가 벗겨지기도 합니다. 이를 보다 못해 하는 수 없이 약하게라도 에어컨을 가동한 것입니다.

비록 어린 조카를 위한다고는 했지만 이웃의 잠을 설치게 했다는 것의 은근히 맘에 걸립니다. 나중에 찾아가던가 아니면 승강기에서라도 만나면 죄송하다는 말이라도 건넬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시간이 바로 다음날 아침에 와버렸습니다. 아내가 조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려고 승강기를 탔는데 공교롭게도 아래층 주인과 얼굴을 마주친 것입니다.

아내는 바로 어젯밤에는 죄송했다며, 여차저차해서 그리되었다고 에어컨을 가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얘기를 들은 아래층 아주머니가 정색을 하면서 조카를 부둥켜안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애가 병원에 간다고 하니 자신들이 항의 때문에 애가 더 아프게 되어 병원에 가는 것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했었던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남을 배려하는 생각이 부족한 것은 분명 우리 쪽인데도 불구하고 괜한 죄책감에 시달렸는지, 아래층 아주머니는 조카에게 주라며 과자를 한 꾸러미 사들고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어제, 볼일을 보려고 승강기를 이용해 내려가는데 바로 아래층에서 아주 연세 드신 할머니가 승강기에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할머니입니다. 인사를 드리면서 몇 호에 사시냐고 여쭈어보니, 바로 아래층에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사를 온지 꽤 되었는데 할머니는 처음 봅니다. 어디를 가시냐고 재차 여쭸습니다. 잠도 못자고 온몸이 쑤셔 병원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저녁에 집에 들어와 아내에게 승강기에서 있었던 할머니 얘기를 했더니, 아내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래층에 모시고 사시는 할머니는 아주머니의 어머니시랍니다. 병환에 시달리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그날 밤도 시끄러운 에어컨 소음 때문에 시간이 깊어감에도 잠을 못 이루시는 어머니를 보다 못해 경비실로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아내에게 이 말을 전해 듣고 나서야 요 며칠간의 일들이 스쳐갑니다. 서울에서 노모의 병환 치유를 위해 공기 좋은 제주도로 왔다는 아주머니의 너무나도 따뜻한 마음에 잔잔한 충격을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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