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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해고된 후배가 놓고 간 수박 한통의 사연

by 광제 2009.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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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된 후배가 놓고 간 수박 한통의 사연

정말 아끼는 후배 녀석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필자가 3학년 때 처음 인연을 맺은 2년 후배입니다. 우리는 공업고등학교 전기과의 선,후배로서 제가 1학년 실습시간 때면 담당교사의 지시를 받고 지도를 하러 몇 번 실습실에 들렀던 것이 후배와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후배는 왜소한 체격에 늘 말이 없었고 실습시간만 되면 동료들 보다 늘 뒤쳐져 곤욕을 치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손놀림이 투박했던 후배는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 실습이간이었을 정도니까요. 과제를 풀어가면서 손놀림 때문에 힘들어하는 후배를 조금씩 거들어 주면서 둘의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우리 둘의 인연은 각별하여 사회에 나와서도 인연은 계속 되었고,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직원모집을 하는 모 회사에 시설담당으로 후배를 추천하게 되었습니다. 후배는 당시 다니던 직장이 문을 닫게 되어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있었는데, 마침 직원모집을 하는 회사가 있어 지인을 통하여 소개를 하게 된 것입니다.

모 회사에서도 직원을 필요로 했던 터라 이력서를 훑어보고는 채용을 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이었습니다. 필자의 회사에서도 정규직와 비정규직이 구분되어 그 실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하면 후배를 정규직으로 입사를 시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회사의 규정상 절대로 정규직으로 채용은 불가하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어떻게든 직장을 구해야만 했던 후배는 계약직으로 그 회사의 시설담당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2년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 몇 일전 필자의 아파트에 수박 한통과 조그마한 쪽지를 하나 들고는 후배가 찾아 온 것입니다. 애들이 집을 보고 있던 터라 만나지는 못했는데, “아빠! oo삼촌이 수박 사주고 갔어~ 편지도 주고 갔는데, 아빠한테 전해 주래~” <이 녀석이 뜬금없이 왠 수박이야, 쪽지는 또 뭐지?> 생각을 하면서 쪽지를 펼쳐봤습니다.

<<형님, oo이 왔다갑니다. 저 회사 그만뒀습니다. 아니 짤렸습니다.
보름정도 지났는데 형님께 말씀드리려다가 상심하실까봐 그때는 말씀 못 드리고 이제야 드립니다.
처음 들어갈 때 계약한 2년이 다되어 새로운 계약을 하지 않겠답니다.
어쩝니까... 나와야죠.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직장생활 하지 않으려구요.

솔직히 더러워서 못해먹겠습니다.

형님께 이런 말씀 드려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직장에 연연하지 않고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해보려고 그럽니다.
아무리 한들 처자식 밥 굶기기야 하겠습니까. 그간 저에게 신경 써주신 형님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다가 수박장사라도 해보려고 중고트럭을 장만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첫 장사하는 날입니다. 형님! 저 처음 해보는 장사입니다.

하지만 악착같이 할 겁니다. 수박을 차에 싣고 가장 먼저 형님댁으로 왔습니다.
제가 비록 수박을 파는 별 볼일 없는 놈으로 전락했지만 제가 새롭게 시작하는 첫 장사의 첫 물건은 형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장사 잘 되면 더 많이 드리겠습니다.
인생,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살겠습니다.

어디에서 장사할건지는 말씀 안 드립니다.
형님 성격에 또 부리나케 달려오실 것 같아서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수박 맛있어 보이는 걸로 골랐으니 맛있게 드십시요.>>

갑자기 쇠망치로 후려 맞은 듯 뒤통수가 띵합니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까지 쏟아지려고 그럽니다. 20여년의 사회생활을 성실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 온 녀석입니다. 뭐가 모자라 젊은 나이에 그것도 처자식이 딸린 가장이 직장에서 내쳐져야 되는 겁니까.

당시 이력서를 받았던 지인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회사의 방침이 정해져 있어서 자기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입사당시 같이 입사했던 직원 두 명도 같이 이번에 회사를 그만뒀다고 하니, 미약한 힘으로는 후배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습니다.

뒤통수 후려친 후배에게 연락을 해봤습니다. 지금 수박을 팔고 있다고 합니다. 어디냐고 물어봐도 알려주질 않습니다. ‘장사하는 곳 알아서 뭐하실려구요? 됐습니다..형님!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선배랍시고 내가 후배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있다면 오직 하나 장사 잘 되라고 빌어 주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서 부터도 늘 곁에서 지켜보고, 결혼하고 자식새끼들 볼 때에도 잊지 않고 알려주던 후배, 어느덧 이제는 나이40을 훌쩍 넘겨 버렸고 자신에게 또 다시 찾아 온 위기를 앞에 두고 이번에는 선배인 나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번만큼은 혼자의 판단으로 결정하고 일을 시작하면서야 찾아왔습니다.

여기저기서 비정규직들이 해고되는 소식들을 접하고 자신도 그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을 알기에 또 다른 직장을 구한들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고 봤는지도 모릅니다. 쪽지에 담겨진 내용에서도 볼 수 있듯이 후배의 새로운 시도에는 다부진 각오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형님! 남자는요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늘 습관처럼 얘기하던 후배, 그 후배가 남기 고 간 수박 한통, 저 수박을 도저히 먹을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글을 써 내려가는데도 눈물이 나는데, 수박을 쪼개면 그 위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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