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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35점 짜리 딸의 성적, 기분 나쁘지 않은 이유

by 광제 2009.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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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성적 35점, 기분 나쁘지 않은 이유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휴대폰의 진동이 오늘 따라 유난히 크게 들립니다. 발신자는 ‘그녀’입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저의 아내입니다. 회사에 출근하면 언제나 하루에 한번은 꼭 전화를 하곤 합니다. 용건이 있건 없건 항상 오던 안부전화이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았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굉음에 귀청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아빠! 난리났어~’ 저의 아내는 저를 부를 때 항상 아빠입니다. ‘아이~깜짝이야..왜 또?’ ‘35점이 뭐야..35점이~ 진짜로~ 내가 못살아~’ 소리를 계속 지르는 아내를 보니 보통 화가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내를 진정시키고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초등학교 2학년인 딸애가 오늘 학교에서 시험 점수를 받았는데, 글쎄 35점을 받았다는 겁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면서 전화를 걸어 온 것이었습니다.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어!’라고 소리치는걸 보니 딸애가 아내 옆에서 단단히 꾸중을 듣고 있나봅니다. 현재상황,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충격은 아내뿐이 아닙니다. 저도 딸애가 35점이란 점수를 받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점수는 받아 본적이 없는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점수였기 때문입니다.

통화를 끝내고 잠시, 딸애가 걱정이 됩니다. 다그치는 엄마의 등살에 또 얼마나 수난을 당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걱정이 앞서,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너무 윽박지르지만 말고 좋게 위로해주라’ 말입니다. 아내가 애들에게 쏟는 열정이 대단하다는걸 알기에 실망도 클 것입니다. 한번 야단을 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딸애 본인도 가뜩이나 본인의 점수에 속상할 텐데, 야단까지 맞으면 행여 마음에 상처라도 받을 수 도 있겠다 싶어 그게 더 걱정입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지루했던 근무시간, 퇴근시간이 되자 부랴부랴 집으로 달렸습니다. 현관을 들어서자 오늘도 변함없이 딸애가 가장 먼저 뛰쳐나옵니다. 여느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표정입니다. 늘 하던 데로 아빠를 부르는 목소리가 살아 있고 얼굴에서도 아무런 그늘도 찾을 수 없습니다. 속으로, ‘얘가 35점이란 점수를 받은 애가 맞나?’싶더라구요. 엄마에게 꾸중도 많이 들었을 텐데, 도무지 딸애의 분위기에선 내가 예상하는 그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내를 살짝 불러 여쭤봤습니다. ‘쟤가 왜 저렇게 기분이 좋냐’구요. 엄마에게 실컷 꾸중을 듣고는 딸애가 엄마에게 한소리를 했답니다. ‘엄마~ 나는 엄마보다 더 속상하거든! 한번 실수 한 것 가지고 창피하게 왜 그래 도대체~’ 2학년 딸애의 이 한마디에 아내는 어이가 없어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고, 딸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는 오후를 보냈다고 합니다.

아내의 얘기를 듣고, 좀 어이가 없긴 하지만 무척 상심하고 있을 것이란 나의 예상을 깨고 평소와 같이 웃고 있는 딸애를 보니 안도의 한숨이 쉬어집니다. 한편으론 안도 보다는 엄마와 아빠를 머쓱하게 만든 딸애가 대견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35점이란 충격적인 점수를 받아들고 저렇게 훌훌 털어버리고 웃고 있는 딸애, 자존심이 유난히 강하여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 자기스스로에게도 화가 날만도 한데 전혀 그런 모습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잠자기 전 책상에 다소곳이 앉아 일기를 쓰고 있는 딸애를 보면서, 오늘 일기에는 뭐라고 쓸지 정말 궁금하였습니다. 꿈나라로 간 딸애의 예쁜 모습을 확인하고는 일기를 슬쩍 들춰봤습니다.

<<‘35점을 맞았다. 기분이 진짜 안 좋았다. 나보다 못 본 사람도, 똑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진짜 실망했다. 내 자신감은 다 사라지고 말았다. 난 내가 이렇게 까지 못 볼 줄은 몰랐다. 엄마도 많이 실망한 것 같았다.’>>

써놓은 일기의 글자 하나하나에 딸애가 얼마나 자신에게 실망했는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을 애써 감췄던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나 속상 할까요.

하지만 아빠인 저는 속상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습니다. 점수를 95점 이상 받아 올 때보다도 더 기분이 좋은 것은 왜일까요. 저는 오늘 어리게만 보아왔던 딸애의 훌쩍 커버린 모습을 보았습니다.

엄마, 아빠보다도 더욱 더 자신이 미웠겠지만 끝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속상해 하는 엄마, 아빠에게 애교를 부리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강한 자존심을 억누르는 모습에서 이미 위로의 대상은 딸애가 아니고 우리 부부였습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하염없이 작아 보이던 딸애의 체구가 오늘따라 유난히 커 보입니다. 기분이 아주 좋은날입니다. 또다시 35점을 받아 온다면 기분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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