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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20년전 월급명세 보며 눈물 짓던 친구

by 광제 2008.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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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밥을 같이 먹게 되었습니다.
이제 서서히 공부에 열중이어야 할 나이에 있는 아이들 얘기며, 이런 저런 살아가는 얘기들을 한참 나누던 중 이 친구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저에게 묻습니다.
 

‘경제사정은 어떠하냐..돈은 많이 벌어놨냐?’

‘많이 벌고 말고가 어딨냐..월급쟁이의 한계가 있는데 그냥 한달 벌어 한달 사는거지머..’

‘에구..니인생이나, 내인생이나 별차이 없네...’

이친구가 무슨얘기를 꺼낼려고 이런 질문을 하나, 혹시 돈이라도 꿔달라는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재산하나 반듯하게 장만한 것도 없는데 3억5천을 전부 어디다 썼을까?’

‘엉? 3억5천이라니.. 뭔소리냐?

밥 먹다 말고 소주 한잔을 들이키고는 이유을 털어 놓습니다.
직장생활 20년동안 받아 온 월급을 합해보니 지날달까지 3억5천이 되더란 얘깁니다. 몇일전에 집에서 시간이 나길래 지금까지 20년동안 모아온 월급명세서를 일일이 계산기로 두들겨 보았답니다.
 

‘참으로 할 일 없는 친구네..그걸 합해 본 것도 그렇지만, 월급명세서를 20년동안 모았단 말야?’

‘응..내가 한달간 일한 결과이고, 보람인데 놓은건데 버리기가 이상하더라고...그래서 한장 두장 모으던게 지금까지 20년이나 모였네...’
‘20년전 직장생활의 첫 월급명세서를 보니까 감회가 새롭더라구....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20년 동안 나..뭐했나 싶어...한심하기도 하고, 하긴 너도 알다시피 다른 생각할 여유 조차도 없이 20년을 달려온 것 같다.’


이 친구 말끝을 흐리더니 소주잔을 기울이며 눈가에 촉촉한 물기가 맺힌 것을 보았습니다.

‘야야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그리고 나중에 20년전 월급명세서나 함 보여줘라’ 하고는 식사를 마치고 몇일 후 월급명세서를 보고 싶기도 해서 그 친구 집에 들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두꺼운 종이로 된 화일이 너덜너덜 해진, 언듯 오래된 고문서 같아 보이기도 하는 화일을 저에게 건네면서 친구놈 눈가에 또 이슬이 맺혀 있었습니다.


무엇이 이놈을 우울하게 만드는걸까, 집으로 돌아 오면서 곰곰히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릴적부터 친구로 지냈던 사이인지라 집안 내력까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친구녀석의 아픈마음을 눈치는 챌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 많고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친구녀석, 동생들 학비 대야 한다고 공업고등학교만 졸업하고는 바로 사회에 뛰어들었습니다. 친구의 아버지는 고등학교때 돌아가시고 어려웠던 가정형편은 더욱 어려워져 고등학교도 겨우 졸업을 하였죠.



동생들이 넷 있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에 나이로 보면, 고등학생동생인 한명, 중학생 한명 초등학교 고학년에 두명, 이렇게 넷이 있었으니 형으로서의 책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자기 자신의 앞가림을 하기에도 힘겨운 시기에 오로지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20~30대의 젊음을 헌신했으니 지금에 와서 20년동안 쌓여 있는 월급명세서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고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간의 3억5천이라는 돈 중에 손에 넣은 것은 없지만  평소에도 친구녀석은 동생들이 학교를 착착 졸업해가며, 사회에 뛰어들고 성인이 되가는 모습을 보며 늘 자랑스러워 했으니 후회는 없을겁니다. 또한 동생들 입장에서 보면 형이 얼마나 고마울까요.


지금 몸담고 있는 직장, 몇 년째 다니고 있냐고 물어보니, 처음 사회생활 할 때 1~2년씩 두 곳의 일자리를 경험한 후에 현재의 직장에 일을 한 지가 18년째를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엊그제 같아 보이는데 세월도 많이 흘렀습니다. 어려운 가정에 가장의 자리에 서서 동생들 바라보며 쉼 없이 앞 만 보고 달려온 친구, 한 곳의 직장에서 오래 머무르다 보니 이제는 그만두기도 은근히 겁이 난다고 합니다. 가장에게서 볼 수있는 책임감 때문일까요, 혹시나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조그만 사업도 못해보고 쌓여가는 월급명세서와 함께해 온 눈치밥의 월급쟁이 20년, 그래도 이 친구 '이렇게 다닐 수 있는 직장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고 늘상 얘기를 하곤 하였습니다.


4년전에는 친구의 노모께서 별세를 하셨고 이제는 동생들이 모두 출가를 하였습니다. 친구와 함께 했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왠지 모를 마음 한구석이 아려옴이 느껴집니다. 전화를 해야겠습니다. 저녁 한번 사겠다고, 그리고 친구녀석에게 말해줘야겠습니다.
'아무리 황금만능시대에 살고 있다지만, 네녀석은 돈보다도 더욱 값진 인생을 살고 있는 멋진녀석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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