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를 고발하겠다는 기발한 생각에 빵 터져
이제 초등학교 4학년밖에 안 되는 딸애를 먼 곳(?)으로 여행을 보냈답니다.
그것도 장장 4박5일에 걸쳐서 말입니다. 딸애가 활동하는 단체에서 시행하는 국토순례입니다.
처음에는 보낼까 말까 많이 망설였지만 딸애 자신에게 커다란 자신감도 심어주고 유익한 경험이 될 것 같아 아내와 심사숙고 끝에 보내자고 결정하게 되었지요.
가까운 곳에 1박 정도 수련회를 보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그것도 배를 타고 먼 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빠인 내가 왜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내에게 챙길 것은 잘 챙겨 넣었냐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기를 수차례, 급기야 너무 신경을 쓴 탓에 잠도 오질 않더군요. 월요일 아침, 피곤한 몸으로 완도행 카페리호가 출항하는 제주항 여객터미널로 향합니다. 뒷자리에 앉은 딸애는 잔뜩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저는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더군요.
아침 8시20분에 출항하는 여객선을 타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터미널 안, 국토순례를 떠나는 아이들도 어림잡아 수백 명은 되어 보입니다.
많은 아이들을 보고 나서야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되더군요.
간밤에 준비해두었던 어린이용 멀미약도 먹이고, 혹시 빠트린 건 없는지 출구로 향하기 전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합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걱정 말라고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신경이 쓰이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
<잘 다녀오겠노라고 손을 흔들어 보이는 딸애>
알이 부족할지 모르니, 전화는 아빠가 할 테니 틈틈이 문자라도 자주하라고 하고는 출구로 빠져나가는 딸애를 한참이나 쳐다봅니다. 멋진 경험을 쌓고 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디 아프지 말고 무사히 다녀오기만을 마음속으로 바래봅니다. 한층 더 성숙해진 딸애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엄마아빠 없이 첫 육지나들이에 나선 딸애의 첫 안부는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휴대폰을 통해 전해집니다. 출발한 시간이 8시20분인데, 불과 3시간도 걸리지 않은 11시6분에 완도항에 도착을 했다는 문자를 보낸 것입니다.
역시 아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딸애, 첫 안부문자에 한결 안심이 되더군요.
도착한 이후의 일정이 비 날씨 때문에 취소가 되긴 했지만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즐겁게 보내는 것 같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녁 무렵에 다시 보내온 문자메시지는 아빠를 잔뜩 긴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첫날 숙소로 정해진 수련원에 들어갔는데, 잠자리의 위생상태가 너무 지저분했던 것입니다. 너무 더러운 상태를 보고는 모텔에다 비유를 한 딸애...;;
바로 얼마 전 거제도 가족여행 당시에 그곳 모텔에서 겪었던 더러운 침구류와 피부가려움증 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당시에도 아빠 못지않게 분노(?)하며 인터넷에 고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딸애가 또다시 비위생적인 숙소에 묵게 되었으니, 문자 하나만 보더라도 얼마나 기겁한 상태인지 짐작이 가더군요.
헌데 어쩝니까.
단체로 움직이는데다 뾰족한 수가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든 지혜롭게 대처를 하도록 맡겨두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날라 온 문자를 보는 순간, 확 깨고 말았습니다.
더러운 상태를 카메라로 찍어 두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다 이런 발상을....;;
간혹 사진촬영을 하여 블로그에 올려 인터넷에 고발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아오던 딸애가 자신도 사진을 찍어 아빠에게 전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이러다가 나중에 블로그도 하겠다고 하는 건 아닌지 심히 염려가 되더군요.
저녁준비를 하던 아내도 어처구니없는 딸애의 문자를 보고는 할 말을 잃은 표정입니다.
전화를 걸어 숙소의 상황을 직접 들어보니 최악인 것은 분명해 보이더군요.
자고나서 깨끗하게 씻으라고 당부하고는 통화를 끝냈지만 여전히 걱정이 가시질 않습니다.
하지만 엄마아빠와 떨어져 먼 곳에 가있어도 위트 넘치는 문자를 보내는 등 여유롭고 밝은 목소리를 듣고 보니 그때서야 저도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답니다.
부디 국토순례의 모든 일정 잘 소화하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그나저나 애들이 눈에도 비쳐졌던 숙소의 비위생적인 모습은 생각할수록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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