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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 올 레

처음으로 개장 행사 참가해 본, 제주올레 11코스

by 광제 2008.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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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이남이, 최광기, 서명숙 한자리에


비교적 늦게 시작한 제주올레 걷기, 코스가 하나 하나 새롭게 개발되어 지고 있고, 급하게 하루 아침에 전부를 경험할 수는 없기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신코스 개발 페이스에 맞춰 따라 잡을 생각이었다. 전혀 뜻하지 않았던 감동을 선사해준 1코스를 비롯하여 예전의 2,3코스였던 지금의 6,7코스를 하루에 걸어봤다. 예정대로라면 2코스인 광치기해안에 서있어야 할 필자였다.


제주올레 홈페이지와 미디어를 통해 11코스를 개장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2일전까지만 하여도 11월30일 일요일은 스캐쥴이 맞질 않았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스캐쥴이 변경되면서 시간이 생겼다. 조금은 망설였다. 차곡차곡 걸어 보리란 나의 계획을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가지 이유가 생겼다. 나는 아직까지 개장행사에 참가해 본 경험이 없다. 과연 신코스 개장의 열기는 어떠한지 몸소 느껴보고 싶어진다. 더군다나 이번 행사에는 평소 좋아하는 손석희 교수가 참석을 한다니 보고싶기도 하였다. 부랴부랴 올레 홈페이지에서 일정표를 다운 받아 출력하고 일요일 아침 가방을 챙겼다.

예비 집결지인 제주야구장 앞, 전세버스 한 두대 정도일 것으로 예상했던 나, 헉! 대충 보아하니 10대가 넘어 보인다. 45인승 버스인데 10대만 해도 450명이다. 왕복 버스비를 지불하고 몸을 실었다. 50여분만에 도착한 11코스 출발지 하모해수욕장, 눈이 휘둥그레 질 정도의 많은 인파가 모래사장을 덮고 있었다. 대체 몇 명이 모인 것인지 짐작조차도 할 수가 없다. 올레 관계자로 보이는 분께 넌지시 여쭤봤다. 헉! 1천명이 모였단다. 대단한 열기다. 강제로 모이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놀아보자의 놀자판도 아니다. 장장 20km의 장거리를 걸어가야 할, 즐거운 걷기가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고행길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참가자들의 표정을 보니 고행길이 아닌 것 만은 분명해 보인다.

△대정 하모 백사장을 가득 메운 올레꾼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최광기씨다. 그런데 여자분이다. 난 남자분인줄 알았다. 이부분에서 비웃지 마시길..솔직히 그분이 누군지 몰랐었다. 현장에서 얼굴 보면 알겠지 했는데, 아니다. 이름만 보고는 남자 사회자인줄만 알았었다. 걷기를 마치고 집에서 검색을 해보니 이크 유명한 분이시넹....이런 죄송할데가...ㅜ.ㅜ 글을 타이핑 하면서도 얼굴이 붉어 지긴 또 첨이다.

한 분, 한 분 애써주신 분들이 소개되고 서명숙 작가님과 가수 이남이 선생님, 그리고 마지막에 손석희 교수님의 모습도 보았다. 손석희교수님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현장에서 본 사람만이 그 인기를 실감했을 것 이다.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이사장으로 계신 서명숙 작가님과 손석희 교수님이다.

△정면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나보다도 훨씬 잘생기셨다.

많은 참가자들을 통솔해야 하기에 '올레걷기' 행사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총 20km를 걸어야 하는 비교적 장거리이다. 정확히 10시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울리고 종종 걸음으로 1천의 인파가 올레로 쏟아져 나왔다. 장관이었다. 마치 금년 봄 한라산 철쭉 등산대회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한발 앞서 출발한 참가자들이나 늦게 출발한 참가자들이나 길게 늘어선 올레길의 올레꾼들의 모습은 끝이 안보일 정도의 장관을 연출하였다. 큰일났다. '올레길'의 비경을 감상해야 하는데, 사람구경만 실컷하게 생긴 것 같다. 

대부분의 올레꾼들이 사전에 어느 정도의 정보를 입수하여 올레길에서 스쳐 지나는 명소들의 내막을 대충은 알고 있을 터, 오늘 지나칠 곳은 일제의 잔재가 잔뜩 묻어 있는, 지금도 일본군이 뛰쳐 나올 것만 같은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알뜨르비행장의 비행기 격납고와 4.3의 아픈 흔적을 간직한 섯알오름 학살터 등을 스쳐 지나가게 된다. 

 △낮게 깔린 돔형태의 구조물이 일본군이 사용하던 비행기 격납고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미군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일제는 미군의 제주도 공략을 예상하여 제주도를 전략상 중요지역으로 인식하였다. 1945년 2월 일본군은 미군과의 일본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제주도 방어에 주력하는 결(決)7호 작전을 구상하였다. 1945년 4월 제주도 방비 강화를 위한 제58군 사령부가 신설되어 일본과 만주로부터 7만여 명의 대규모 병력이 제주도에 집결 주둔하였다. 제주도내에는 해방 직전 일본군이 조성해 놓은 거대한 군사시설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일제가 만든 여러 군사 시설 중에 비행장은 두 곳이 있다. 현 제주공항 자리인 정뜨르비행장과 송악산 북서쪽 해안가와 맞 닿아 있는 이 곳 알뜨르비행장이다.


알뜨르비행장은 1926년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1945년 패망 직전에는 80만 평에 달하는 비행장으로 만들어졌다. 매일 5000명 정도의 제주양민들이 동원되어 이곳에서 강제노동을 했다고 하니 그들의 피와 땀이 너른 들판에 묻혀있는 셈이다. 현재는 대부분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유난히 감자밭이 많다.
사진에 보이는 낮은 돔 형태의 구조물들은 ‘아카톰보(Akatombo·빨간잠자리 비행기)’라 불리던 비행기를 숨겨두었던 돔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콘크리트로 위를 덮고, 위쪽은 미군 공습을 피하기 위해 흙으로 덮여 있다. 근처 바닷가에서 가져온 자갈과 모래, 시멘트, 철근 등을 혼합해서 만들었다. 현재 20여개 정도가 남아있어 실제로 구조물 가까이 다가가면 의외로 넓은 공간과 비행기의 은신처가 될 수 있도록 아래쪽으로 파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운데가 움푹 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학살터다. 주변으로 올레꾼들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2차 대전 말기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제주도 전체를 군사 요새화한 일제는 이 섯알 오름에 전쟁을 위한 탄약고를 축조하였고, 그들이 패망하여 떠나면서 폭파시켜 버린 까닭에 큰 웅덩이 모양을 하고 있었다.


1950년 음력 7월 7일 새벽, 버려진 이 탄약고 터에서 193명의 양민이 군경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종결된 것으로 여겨졌던 4 3의 피바람이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또 다시 불어 닥쳤던 것이다. 좌익분자를 사전에 격리,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된 '예비 검속'은 무고한 양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날 새벽 2시에 처형된 이들의 시신은 유족들에 의해 수습되었으나, 새벽 5시에 처형된 132명의 시신은 당국의 방해로 6년 8개월 만인 1957년에야 비소로 수습될 수 있었다. 진실이 밝혀질 것을 꺼려한 정권의 압력 때문이었다. 탄약고 바닥은 시멘트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빗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아, 시신들이 썩어 마치 늪처럼 변해 갔다고 한다.

이 곳 학살터 주변에 있는 소나무들이 공통적으로 특이한 점이 있었다. 하나같이 넝쿨들이 밑에서 부터 위까지 감겨져 있는것이다. 필자의 눈에만 비춰 졌는지 또한, 혼자만 그리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억울하게 숨진 영령들이 그나마 있는 소나무라도 의지하여 몸부림을 친 흔적은 아니었는지, 지나면서 문득 이러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이제 알뜨르 비행장의 아픈역사와 섯알오름의 억울한 영령들을 잠시나마 위로하는 마음을 뒤로 하고 저 멀리 보이는 모슬봉을 향하여 걷는중이다. 올레길 양쪽으로 초록색의 밭작물은 모두 마늘이다. 이 곳 대정 지역은 마늘이 정말 유명한 지역이다. 간혹 고구마밭이 극소수 보이고 나머지는 죄다 마늘이다.



스쳐지나는 올레길의 아름다운 풍경들이다.  경운기를 개조하여 만든 일명 '탈탈이'도 보인다. 그런데 필자가 어릴 때 보던 그 것과는 마니 틀려 보인다. 세월이 흐르면서 개조능력도 많이 발전했는가 보다. 조금있으면 오를 모슬봉의 모습도 한층 가까이 다가오고, 길가의 고구마밭에서 고구마를 캐는 어머니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런데 어머니들, 이 길이 '올레길'인지 아직 정보 입수를 하지 못했나 보다, '무신 사름덜이고~멋허는 사름덜이꽈~' 그러신다.^^*

대정 농협에서 준비해 준 일명 '마농차'도 한잔 마셔서 힘도 조금은 회복되고, 찻길을 건너고 조금 가파른 모슬봉을 오른 후 내려다본 모습은 또한 절경이었다. 눈쌓인 한라산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거기에 산방산과 단산(가까이 보이는 뾰족한산)이 어우려 지니 기가 막힌 비경이 만들어진다. 바닷가 방향으로 형제섬의 모습과 가파도와 마라도의 모습도 끝내주는 절경이었으나 역광으로 사진을 망쳐 버렸다.


10시에 출발하여 여기에 도착한 시간이 12시30분이다. 이 곳에서 점심을 먹어야 할 곳이다. 물론 식권을 구입하여 이용한 식단이지만 나름데로 대정농협 관계자들이 올레꾼들을 위하여 많이 애쓴 흔적이 느껴졌다. 이곳은 정난주의 묘가 있는 대정성지이다.  


정난주(마리아)는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장녀로서 15세의 어린나이에 진사에 급제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던 황사영(알렉시오)의 아내이다.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천주교도들을 처형하자 충청도 배론으로 피난하여 은거하면서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 천주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보고하면서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백서가 발송되기 직전에 체포되어 능지처참의 판결로 처형되어 순교하였고, 그이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에, 아내 정난주는 제주에, 두 살 난 어린 아들 황경환은 추자도에 유배되었다. 정난주는 대정현 노비로 37년 동안 고생하며 신앙을 지키다가 1838년 66세에 세상을 떠났다. 제주의 천주교 신자들은 정난주를 신앙의 증인으로 존경하며, 그의 묘소를 성지로 꾸미고 신앙의 얼을 기리고 있다.

왠 춤꾼? 맞다 춤꾼이다.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는 진짜 춤꾼 박경숙선생님이시다. 제주도 향토무형문화재 3호이시다. 지화무, 남천무의 대가이시다. 남천무를 선보여 주시려고 이자리에 서셨다. 혼이 담긴 춤사위에 올레꾼들이 진짜로 혼이 나가 버린 시간이었다. 올레길 개장행사중 공연행사로 마련된 춤사위에 2시간 30분 걸어온 올레꾼들의 피로가 가시는 신명나는 시간이었다.




가수 이남이 선생님의 구수한 목소리로 '한동안 뜸했었지'와 '울고 싶어라'의 열창에 또한 올레꾼들이 하나가 되고, 흥겨움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아뿔싸 오후 2시가 되버렸다. 서둘러 재촉하시는 서명숙 작가님. 

올레길에서는 늘상 보여지는 것중에 하나가 누렁이다. 이녀석은 상당히 똑똑한 녀석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보아온 그 어떤 '개' 보다 영리하다. 발길이 이어지는 올레꾼들의 기나긴 행렬을 보고싶어서 자기집 지붕으로 올라간 녀석이다. '울나라에 나보다 똑똑한 녀석 있으면 나와 보라구...'

지금부터는 정글의 탐험이 시작되는 곶자왈 올레길이다. 곶자왈은 곶과 자왈 두 단어가 합쳐 만들어진 것으로도 풀이하고 있으며, '곶'은 산 밑의 숲이 우거진 곳 이라 하여 고지와 같은 뜻이며, '자왈'은 가시덤불과 돌무더기가 마구 엉클어진 곳을 일컫는다. 제주도의 숨골, 한라의 심장부, 숨 쉬는 허파, 세계유일의 생명의 숲, 바로 제주도가 후손을 위해 지켜 보존해야 할 나가야 할 자연환경이다.

 이 곳 무릉리 곶자왈 숲길은 2008년 10월에 있었던 제9회 아름다운숲 전국대회 아름다운 숲길 부문 공존상 수상하기도 한 올레길이다. 


제주스러운 밭담의 정겨운 풍경의 올레길을 지나면 대문이 없어 아름다운 마을 무릉리로 접어든다.

무릉리에는 이 처럼 아름다운 호수같은 연못도 있었다. 이곳에서 잉어를 키운다고 한다.

제주의 상징 정낭의 모습이다. 이 곳 무릉리에는 대문을 설치할 수가 없다. 주택을 신축하여도 이 처럼 필히 정낭을 설치해야 한다. 필요에 따라 정낭의 한쪽을 내려 그곳으로 출입을 하거나(우) 모두 걸어놓아 출입을 못하게 막기도 한다.(좌) 사정에 따라 그 올리고 내리는 숫자를 조정한다. 맨 위의 것부터 내리고 아래의 것은 나중에 내린다. 이를테면 하나를 걸친다면 위의 둘은 내리고 맨 아래의 것을 걸친다.

정낭이 걸쳐지고 내려진 상태를 보아 집에 사람이 있고 없고, 가까이 있고 멀리 있고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본래 그러한 사정을 알리는 신호의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마당에 곡식을 널어 말릴 때는 사람이 집안에 있어도 정낭을 있는 대로 걸치기도 한다. 이로 보아 정낭은 우마의 출입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걸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 정낭은 대문과 다름이 없다. 사람이 안에 있으면 굳이 닫아 걸지 않아도 되고 사람이 집에 없더라도 가까운 곳에 있다면 반쯤은 열어 두어도 되고 사람이 멀리 외출 중이라면 제대로 닫아 걸어야 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사람보다는 우마의 출입을 막는 데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대문과 크게 다르다. [참고문헌]-제주도민속


이제 다 왔나 보다. 무릉리의 환영 현수막이 걸려있고 제주도 사람도 잠깐 망설여 지는 사투리가 구수하게 쓰여져 있다. '걸르멍 봉거 하영 고라줍써!' <걸으면서 보신 풍경 돌아가셔서 많히 선전해 주세요>란 내용입니다. 오른쪽 사진은 11코스의 종착점 무릉국민학교입니다. 교문에 국민학교라 쓰인 글자가 왠지 정겨워 보이는데요, 초등학교로 바뀌기 전에 폐교가 되었답니다. 이제는 생태체험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참가하여 1천명의 많은 올레꾼들과 같이 호흡하면 걸어 본 제주올레 11코스, 총 소요시간 4시간30분, (점심시간에 행사를 하여 시간이 지체된 관계로 점심시간 1시간30분은 뺌). 해는 뉘엿뉘엿 저 산너머로 꼬리를 감추고 몸은 고단하여 피로가 몰려 오지만 그래도 다음이 기다려 지는 건 왜일까요. 11코스를 정비하고 길을 트는데 협조를 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저는 아직 가보지 못한 성산포 광치기해안, 2코스 출발점으로 향합니다. 11코스에 함께 하셨던 올레꾼 여러분 푹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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