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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스런 제주

4.3의 억울한 영혼들, 이제 편히 잠들게 해 주세요

by 광제 2008.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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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명의 억울한 영혼이 머무는 곳


이곳에서 4.3의 진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국방부의 교과서 수정 요구 등으로 4.3을 폭동으로 규정하며 진실을 왜곡하려 하더니 급기야는 종교인의 입에서도 ‘양민을 살해한 1000명이 넘는 폭도들까지 4.3평화공원에 이름을 새겨 추모한다.’라는 망언을 일삼고 있습니다.<'제주의소리' 매체 통한 블로그뉴스 기사> 시간이 지날수록 명예회복은커녕 진실이 더욱더 묻혀 버리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2003년 10월 국가로부터 공식 사과를 받아낸 이후 회복 될 것 같았던 수만의 억울한 영혼들은 근래의 왜곡시도와 망언으로 땅속에서 조차 난도질을 당하고 있으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직도 영혼들이 편히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4.3 평화공원을 찾았습니다. 영혼들의 억울한 함성의 외침일까요, 공원의 곳곳에는 까마귀들의 서글픈 울음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습니다.

진실을 알고 있는듯한 총구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1947년 3월 1일은 제주현대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되는 날입니다. 3.1절 기념대회 후 군정경찰이 군중을 향해 쏜 총탄으로 6명이 희생됐는데, 이사건에 항의하여 1947년 3월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습니다. 파업은 제주도청부터 시작해 법원, 검찰등 각 관공서, 운수회사, 통신기관, 금융기관, 학교로 번졌고 상점까지 문을 닫았고, 심지어 제주출신 경찰 66명도 파업에 동참했습니다. 민,관 직장인 90%이상 참여한 총파업은 제주도내 166개 기관과 단체에서 41,211명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제주사회에 긴장이 고조, 외지출신의 도지사에 의한 편향적 행정 집행, 그리고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의한 검거선풍, 테러, 고문치사사건 등이 잇달아 터졌습니다. 이런 긴장상황에서, 조직원의 신원 노출로 인해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발맞추어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 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으로 4월3일 무장봉기에 참여한 인원은 350명입니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양민에 대한 대학살은 제9연대장 송요찬이 1948년 10월 17일 정부의 최고지령에 따라 “해안선에서 5km이외에 있는 사람은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 는 포고령을 발포하면서 예고됐고, 11월17일 계엄령이 선포됨에 따라 본격화 됐습니다. 이때 9연대에 의해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 진압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하였습니다. 강경 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습니다. 4·3사건으로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는데, 대부분 이때 방화되었고, 결국 이 강경 진압작전은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명 가량을 산으로 내몰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이 무렵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피해마을은 세화, 성읍, 남원으로 주민 30~50명씩 희생되었습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6년 6개월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를 빚은 4·3사건에서 발생한 희생자 숫자를 명확히 산출하기엔 매우 어려우나, 전체 희생자는 약 25,000명~30,000명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심지어 '8만명 희생설'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3만명이라는 숫자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라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 를 차지하고 있는 것 조사되었습니다.


 

4.3특별법을 공포한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2000년 1월12일 서명문서(左)와 평화공원에 걸린 방문객들의 영혼들을 위한 소망을 담은 메세지들


 

도민들의 피눈물 나는 진상 규명의 노력도 줄기차게 이어졌다. 제주 4.3학살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에서 줄곧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였으나 역대 정부는 이를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는 발언이 있었고, 1999년 12월 26일 국회에서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0년 1월 12일 제정 공포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습니다.



 

조형물 귀천(歸天)

4.3 당시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위무하기 위한 작품이다. 제대로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영혼들이 이제라도 수의를 입고 편안히 저승기로 가시라는 해원의 의미다.


4.3 위령재단

추모.승화 광장은 오석의 아치형으로 영원성을 상징하는 동시에 도민화합, 민주와 인권 그리고 안락의 공간을 상징하며 참배공간을 제공한다. 이 곳 위패봉안소에는 13,447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변병생 모녀상

봉개동 지역에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벌어지던 1949년 1월 6일 변병생(당시25세)과 그의 두 살배기 딸은 거친오름 북동쪽 지역에서 토벌대에 쫒겨 피신도중 토벌대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후 일 행인에 의해 눈더미 속에서 이 모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모녀상은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이 두 생명을 기억하고자 하여 제작되었다. 

비설(飛雪): 비설은 ‘쌓여 있다가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눈’을 뜻한다. 눈보라가 치던 한겨울, 아무런 영문도 모르채 안타깝게 죽어간 모녀의 모습을 마치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비설(飛雪)의 의미와 중첩시켰다. 옛날 어머니들이 불러주던 자장가 ‘웡이자랑’이 새겨져 있는 돌담길을 따라 모녀상에 다다르면 눈밭위에서 웅크린 채 죽음을 맞는 어머니와 딸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베를린 장벽

2007년에 독일 베를린시가 제주도와의 친선을 위하여 기증한 장벽으로 1961년에 설치되고 1989년 붕괴된 통일독일의 상징물이다. 높이 3.8m, 폭 1.2m, 두께 0.4m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제주4.3 학생문예 공모작 2001년도 최우수상을 수상한 작품 당시 오현고등학교 2학년 조동혁군의  '통곡의 별'을 소개합니다.


통곡의 별


그 누가 들었으랴

그들의 언성을

그 누가 보았으랴

그들의 피눈물을

나는 보았어라

가슴으로 느꼈어라

짓 이겨진 가슴안고

밤새 울어야 했던

나의 어머니  너의 어머니

발소리 하나에도

숨조차 죽여야 했던

피투성이 살덩이를

백록담 물로 조차 씻을 수 없는

그 오욕과 설움을 품어야 했던

나의 아버지  너의 아버지

동족이 어디 있으랴

한민족이 어디있으랴

단군이 어디 있으랴

선인이 어디 있으랴

욕망과 본능에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는

밤새 울어야 했던

그 나날들을

너희들은 보았느냐

너희들은 들었느냐

같은 동족

총칼 손에 들고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는

밤새 쫓기었더라

가진 것도 몸도 아니요 악도 아니더라

오로지 나의 가족 나의 형제

단지

단지 그것 뿐이었더라


나의 부모는 한낮 작은 곤충이었더라

어린아이 장난감이었더라

삼진이 무엇이더냐

태워 사라지고 

밥 못먹어 쓰러지고

총칼에 없어지신

태워도 나의 부모는 살아 있더라

한 줌의 재가 되었어도

한줄기 연기 되었어도

나의 가슴 가슴에

고이 묻혀 있더라

덩그러니 뼈만 남았어도

그 슬픈 얼굴

잊을 수가 없더라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바로 제주가 있었더라

한에 찌든 혼 조차도

위로 받지 못했더라

제주 절경지 돌에는

수십 년 파도에도, 바람에도

나의 어머니 피는 사라지지 않았더라

나의 아버지 피는 사라지지 않았더라

느껴 보았는가

서러워도 힘들어도 슬퍼도

눈물 소리 한번 내지 못하는

그 마음을

제주바람

그 칼날보다 날카롭고

얼음장 보다 차가운

그 바람

그 바람을 온몸에 맞았더라

그 추위에도 그들은 떨지 않았더라

단지 두려움과 분노에 떨었더라

의로움이 무엇이더냐

옳고 바름이 무엇이더냐

제주 장두들은

한 분 한 분 쓰러져 갔고

우리네 아버지 가슴에는

형제를 거룩한 땅에 묻었더라


한 맺힌 가슴 안고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기렸더라

그들의 식량을, 돈을 약탈하였으나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는 마음을 약탈 당하였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으나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는 희망 불살라졌으며

그들은 모두 죽었으나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는 다시 살아나셨다

의로운 넋으로 다시 살아나셨다

제주

이 거룩한 땅은 다시 일어날 것이며

그들은 용기와 의지, 의로움으로

결국 승리한 것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의 한을

씻어드려야 할 것이리라

그들의 눈물을 닦아 드려야 하리라

오욕의 나날을 벗겨 드려야 하리라


아직도 끝나지 않은

4.3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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