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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스런 제주

제주의 이화마을, 달동네 남수각을 아시나요

by 광제 2010.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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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이런 마을도 있답니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으며 다양한 볼거리들을 간직하고 있는 대한민국 제일의 관광지 제주도, 화려한 문명과 운치 있는 옛 초가가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는 독특한 제주도를 많은 사람들은 기억하고있습니다.


밤낮으로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화려한 제주시내의 도심지 뒤편으로 근대화의 역사를 살짝 엿볼 수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제주를 상징하는 전통 초가로 이루어진 마을도 아니고, 개발의 붐을 타 빠르게 변모해온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마을입니다.


제주판 달동네, 바로 '남수각'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이곳에 가면 달동네라기보다는 얼마전 이승기의 날개벽화로 홍역을 치른바 있는 종로의 이화마을이 연상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약 30년 전만 하더라도 마을로 들어서면 시끌벅적 활기 넘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여름이면 냇가에 고인 물가에서 멱을 감던 꼬맹이들의 모습들도 간간히 보였었는데, 이제는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습니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인 동문시장으로 들어서 깊숙이 안쪽으로 들어서면 하늘이 열리는 곳, 물이 흐르지 않는 조그마한 하천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산지천의 상류입니다. 하천계곡을 가운데 두고 암벽위에 촘촘히 들어서 가옥들, 이곳이 바로 남수각 사람들이 살아가는 제주의 달동네입니다.


1946년 4월, 모슬포에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창설되고 부터 육지와 제주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자연히 각종 상품에 대한 수요 및 인구가 증가하게 되고 제주항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인 지금의 동문로터리 인근에 재래시장이 형성되게 됩니다. 남수각은 동문시장에 입점하지 못한 사람들이 노점상 형태로 장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오갔던 곳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화려했던 영화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전히 위태로운 가옥들, 야속하게 주인이 떠나버린 쓸쓸한 빈집들, 견디다 못해 쓰러진 담벼락에 우거진 잡풀들, 툭 치면 으스러질 것 같은 담벼락, 끝이 보이지 않는 좁다란 계단길,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너무나도 귀한 나무전봇대도 지금에 와서 보니 참 이색적입니다.




주인이 집을 비운지 아주 오래된 것 같은 가옥의 마당에는 호박 넝쿨이 한가득입니다. 녹이 슬어 금방이라도 쓸어질 것 같은 철문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 줍니다.
  

남수각 하천은 상습 침수지역이기도합니다. 2007년 9월16일 제주를 강타한 태풍 나리 때의 모습입니다. 당시 침수의 높이만도 무려 1m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보다 앞선 1999년 7월23일부터 8월4일까지 홍수로 침수되기도 했었습니다.


주인은 없어도 또다른 생명력은 꿈틀대고 있습니다. 콘크리트벽을 뚫고 나온 질긴 생명력입니다.



제주에서는 보기 힘든 수세미 넝쿨, 이곳에서는 쉽게 눈에 띠었습니다.





짓다 말았는지 무너져 내린 것인지 모르는 건물 잔해에는 담쟁이만 칭칭 감겨있는 모습입니다. 


산지천의 상류지역, 건천의 특성상 바짝 마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남수각 하천의 풍경뒤로 도심지의 빌딩들이 이채롭습니다.
 

성인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것 같은 좁디좁은 골목길


아주 오래전에 자취를 감춘 줄 알았던 나무전봇대(목주)도 이곳에서는 볼 수 있습니다.


제주의 색다른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슬쩍 발길을 옮겨 놓아도 좋을듯합니다. 개발의 때가 묻지 않은 약간은 퇴색된 분위기를 찾는다면 말입니다. 좁다란 골목길에 희미하게 비춰주는 가로등이 야간에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사진을 좋아하는 분들의 출사지로도 알려진 곳이기도 합니다.


'남수각'은 산지천 위에 만들어졌던 다리를 말합니다.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하여 고려말과 조선초 사이에 석성인 제주읍성을 쌓게 되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제주읍성 안에는 산지천이 있으며 읍성에는 동. 남. 서 3문이 있고 북으로 수구 2문이 있었다고 적고있습니다. 이후 1599년(선조 32)에 목사 성윤문이 제주읍성 동. 서. 남문에 누각을 세우고 남북의 두 수구(水口)에도 '남수각' 과 북수각을 설치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1886년(고종23) 7월에 큰 홍수가 나 홍예가 무너져 이듬해 다시 쌓았다고 전합니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태풍과 홍수에 의해 무너져 버려 유실과 축조를 반복하다가 지금은 오현단 앞 도로변에 남수각의 터를 가리키는 비만 세워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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