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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스런 제주

부활절에 찾아간 천주교 성지, 제주표착기념관

by 광제 2009.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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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해안에서 멀리 차귀도를 바라보며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천주교의 성지,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을 찾았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며 순교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로 부터 사제품을 받은 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 일행 13명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하는 도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표착하게 된 곳이 바로 이곳 용수리 해안입니다.


김대건 신부가 고국에서의 첫 미사를 올리게 된 곳이기도 합니다.



제주 용수리 해안에 표착할 당시의 라파엘호를 형상화하여 만든 기념관의 멋진모습과
왼쪽에는 기념성당의 모습인데, 김가항 성당의 모습을 재현한 것입니다.


라파엘호를 전시해 놓고 있는 외부전시관입니다.
이 배는 1845년 김대건 신부 일행이 제물포에서 상해로 가고 돌아올 때 탔던 무동력 목선으로
'길을 인도하는 대천사 성 라파엘'의 이름을 붙인 배입니다.
배의 길이는 13.5m, 너비는 4.8m, 깊이는 2.1m, 중량은 27.2톤의 범선입니다.
 

기념관으로 들어서자 마자 눈에 들어오는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입니다.


기념관 1층에 있는 유해공경실입니다.


기념관 2층 입구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흉상인데요,
김대건 신부의 얼굴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뼈대를 제작한 뒤
19세기 당시 남성의 윤곽에 맞춰 찰흙을 붙여 청동으로
1999년~2001년 카톨릭대에서 제작한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친필 회유문과 미리내 103위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김대건 신부의 아래턱 뼈

이밖에도 김대건 신부는 21통의 서한과 1통의 순교보고서,
2통의 작문, 1편의 조선 전도 등 25건의 문서를 남겼습니다.

위의 서한은 21통의 서한 중 마지막의 한글 서한인 '교우들 보아라' 라는 회유문이고,
한문 서한 (1844년 12월)과 라틴어 서한(1846년 8월 26일 자의 옥중서한)은
현재 프랑스어 번역본만 남아 있는 실정입니다.

위의 회유문은 조선의 교우들에게 교리를 충실히 따르도록 부탁하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고자 한 것으로 이를 통해
조선교우들에 대한 김대건 신부의 지극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국내 그리고 국제의 활동상을 자세하게 그림으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신분을 감추기 위해 입었던 상복

조선에 입국하였던 선교사들은 서양인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
자연스럽게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상복을 입고 다녀습니다.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이러한 상복을 착용하고
교우촌이나 옮겨 다녔으며,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페레올주교와 다블뤼 신부 역시
라파엘호를 타고 충청도 강경의 황산포로 입국할 때 이러한 형태의 상복을 입고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표착 상태에 있었던 라파엘호가 폭풍을 만나 싸우는 장면도 그려놓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첫 미사 장면 재현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떠난 선장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일행이 20여일을 표류한 끝에 1845년 9월 28일 이곳 용수리앞의 차귀도에 정박하여 감사 미사를 봉헌하는 장면입니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바랑신부님,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 모두는 여행의 목적지에 닿았고, 고생도 끝났다고 믿었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전시해 놓은 공간.



이 곳은 김가항 성당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표착기념성당의 내부모습입니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김대건 신부의 제주표착을 뜻깊게 생각하여 이곳 용수리에 기념성당과 함께 기념관도 세우게 됐는데,
성당의 정면은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김가항 성당의 정면 모습이며 지붕은 파도와 라파엘호를 형상화 하여 만든 것입니다.

기념관은 4300평 대지에 168평 규모의 2층 건물로 2006년 11월 1일에 개관하였으며 1층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공경실과 관리실이 있고 2층에는 김대건 신부의 당시 표착 모습과 첫번째 미사 봉헌 장면도 재현해 놓았습니다. 또한 김대건 신부관, 제주교회사관, 제주교구 선종 사제관 등 천주교 역사 관련 자료들을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외부 전시물로는 김대건 신부 일행이 타고 왔던 라파엘호를 고증.복원해 전시해 놓고 있기도 합니다.

2008년 9월에는 기념성당도 개관을 하였는데, 중국 상해의 김가항 성당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는?

본관은 김해. 충청남도 내포(內浦) 솔뫼(지금의 당진)에서 태어났습니다. 증조할아버지 진후(震厚)는 50세 때 교인이던 아들의 권유로 입교(入敎)한 후 1791년의 박해 이래 수차례 검거되어 고문·귀양 등의 고난을 겪다가 1814년 충청남도 해미(海美) 옥중에서 순교했습니다. 이에 할아버지 택현(澤鉉)은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했으며, 김대건은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제준(濟俊)은 다시 내포로 이사하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한양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습니다.

이같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자라난 김대건은 1831년 조선교구 설정에 이어 1836년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방침에 따라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적합한 소년을 물색하던 P.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崔良業)·최방제(崔方濟)에 이어 선택되었습니다. 모방 신부는 이들에게 라틴어와 함께 성직자로서의 기본소양을 가르친 후 이들을 12월 2일 한양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 유방제(劉方濟) 신부편에 마카오로 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모방 신부는 가장 늦게 선정된 그의 마음을 잘 몰라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김대건이 "앞으로 조선성교회를 위하여 몸을 바치겠다"고 굳게 맹세하여 함께 보냈다고 합니다.

이들은 만주·내몽골·중국을 거쳐 8개월 만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東洋經理部)에서 정식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먼저 중등과정을 마친 후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했으며, 이들 중 최방제는 1838년 병사했습니다.

1841년 9월 김대건 신부는 아편전쟁을 틈타 중국과 조선에서의 이권을 위해 파견된 프랑스 군함 2척 중 1척에 동승하여 1842년 양쯔강[揚子江]에 이르렀으나 난징조약[南京條約]의 체결로 군함이 되돌아가자 중국인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만주로 향했습니다. 이어 1842년 12월에는 압록강을 넘어 평안도에 진입했으나 여러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다음해 1월 만주로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또 1844년에는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éo) 주교의 명으로 외국인 신부들의 조선입국을 위해 두만강을 넘어 조선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한 탄압의 분위기와 악화된 건강 때문에 천주교회의 수습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채 4월 배편으로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갔습니다. 여기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8월에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았으며, 이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 탄생이었습니다.

10월에는 배편으로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조선으로 향하여 천신만고 끝에 충청도를 통하여 입국에 성공했습니다. 이어 그는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한양으로 잠입하여 활발한 전교활동을 펼쳤습니다. 1846년에는 아직 만주에 머물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 등의 입국을 위해 서해안 길을 개척하다가 6월에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옹진군 감옥을 거쳐 해주감옥에서 황해감사로부터 심문을 받고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성장하고 천주교를 펴기 위해서 귀국했다"는 사실을 자백했습니다.

이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가의 금령을 어기고 출국한 사실 및 천주교의 신부임이 밝혀졌는데, 이 과정에서 몇몇 대신들의 부탁으로 세계지리의 개략을 책으로 만들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번역하여 2벌의 지도를 채색하여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 조선정부는 그동안 권세를 누리면서 천주교 박해에 앞장서 왔던 풍양조씨의 세도가 막을 내리는 등 큰 권력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김대건 등의 옥사가 크게 중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846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인 신부 3명의 처형을 따지기 위해 프랑스 함대가 충청도 홍주 앞바다에 기항하고 조선국 정대감 앞으로 된 문책서를 전달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크게 놀란 조선정부는 그의 처형을 결정했고, 마침내 김대건은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교인들이 수습하여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산중에 안치되었으며, 조선최초의 천주교 신부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열성적 전교활동과 경건하고 당당한 신앙자세 때문에 이후 천주교인들의 귀감이 되어 많은 교회나 수도회의 주보(主保)가 되었습니다. 192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에는 103인 성인의 하나로 선포되었습니다.<Daum백과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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