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24년 된 냉장고의 사연

사는 이야기 2009. 9. 11. 07:34 Posted by 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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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24년 된 냉장고의 사연

주방 뒤 베란다의 한켠에는 낡은 냉장고가 하나 있습니다. 아내는 이 냉장고에 신김치나 생수 등 자주 꺼내지 않는 음식들을 보관해 놓고 있었습니다. 1998년도에 결혼할 때 아내가 버리자고 했던 미니냉장고입니다. 그런데 제가 극구 만류하여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잘 써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내가 냉장고의 냉기가 없어졌다며 저를 부릅니다. 음식들을 꺼내고 이리저리 살펴보니, 노란 액체가 흘러내린 것이 보입니다. “어딘가 고장이 났구나!” 생각하고는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하려고 수화기를 들었는데, 아내가 한소리 합니다. “이제 그만 버리자.”고  말입니다.


지금껏 고장 없이 잘 버텨 와준 미니냉장고, 그러고 보니 쓸 만큼 썼습니다. 그동안 사용하면서 잔고장이라도 나고 그랬으면 진즉에 버렸을지도 모르는 미니냉장고입니다. 오랜 세월 정도 많이 쌓였는데, 버리자니 이 녀석이 좀 측은해 보이기도 합니다. 손 때가 묻은 냉장고를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스티커에 제조년월이 눈에 들어옵니다. 1985년 생산된 제품입니다. 24년이란 세월을 저하고 같이 한 셈이네요.
 


중학교 시절에는 집에서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학교를 다녔지만, 고등학교부터는 집을 떠나 살면서 자취를 하여야 했습니다. 당시의 자취생활이라 해봐야 별것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석유곤로를 이용하여 밥을 해 먹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기밥솥이란 걸 썼던 기억이 납니다. 국이라고 끓여봐야 콩나물에 두부 몇 조각 뚝뚝 썰어 놓고는 간단하게 만들어 먹거나, 촌에서 장만해온 나물에 된장 풀어 넣어 된장국을 만들어 먹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반찬이라고 해봐야 시장에서 파는 멸치볶음과 어포 볶음, 그리고 간단하게 먹기 좋은 계란후라이에 김치가 전부였었죠. 물론 저보다 더 오래전에 자취생활을 경험하셨던 분들이 보기에는 괜찮은 생활했다고 볼지 모르겠지만 저희 때는 이랬습니다. 김치는 일요일에 부모님 께 찾아가면 어머니께서 해주시곤 했는데, 항상 맘에 안들었던 부분이 쉽게 익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김치라고 하죠.


어머니께서는 신김치 먹는 아들이 못내 안쓰러웠는지, 어느 날 오후에 아들이 자취를 하는 집으로 찾아왔는데, 물건 살게 있으니 같이 나가자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따라나선 곳은 다름 아닌 전자대리점입니다. 조그마한 냉장고를 하나 들여 놓자고 하십니다. 김치도 넣어두고, 보리차도 끓여서 넣어두면 오래도록 먹을 수 있다고 하면서 냉장고를 샀는데, 가격이 기억나질 않습니다. 당시에도 10만 원 이상은 주셨을 것 같은데, 넉넉지 않은 살림에 자취하는 아들을 위해 정말 큰맘을 잡수신 겁니다.


냉장고가 주인을 잘 만난 탓인지 모르지만 별다른 고장도 없었습니다. 결혼하기 전 까지도 늘 함께 하다가 결혼하면서 버릴까 하다가도 어렵게 장만해준 어머니 때문에 쉽게 버리지 못했는데, 이제야 제 명을 다했습니다. 고쳐서 쓴다면야 못쓸 것 없겠지만, 서비스센터에서 왠 청승이냐 할까봐, 이제 아내 말을 듣고 버리려합니다. 아마도 어머니께서 살아계셨다면 버리지 못하게 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정도 썼으면 저승에 계신 당신께서도 아무런 불만이 없으실 겁니다.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무척 생각나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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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Favicon of http://yim3204.tistory.com BlogIcon 분홍별장미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는 이번 여름때 이번에 냉장고 바꿨어요 16년정도 된 냉장고네요. 대우탱크냉장고~~ 물이 자꾸 새서 ;; 김치 냉장고도 함께~~ 진작에 바꿔드렸어야 하는데..;;; 양문형냉장고를 너무 부러워 하셨다는 ^^;; 이제는 바꿔서 많이 좋아하십니다 ㅎㅎ
    아참 저희집에 선풍기 110V짜리 사용하고있어요. ㅋㅋㅋ 도란스??? 110V로 전환해주는 그런 파란기계인데 ㅋㅋ 선풍기가 금성꺼예요. 저 태어나기전부터 사용하셨다고 하던데 ㄷㄷㄷ 29년은 넘었겠네요 ㅋㅋ

    2009.09.11 12:11 신고
  3. Favicon of https://lowr.tistory.com BlogIcon 하얀 비  수정/삭제  댓글쓰기

    버리지 말라고 보이콧하러 또다시 왔습니다^^ㅎㅎ 이 글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답니다. 워낙 여기저기 혼란스러운 일이 많아서 이 글을 읽으면 마음이 또 차분해져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2009.09.11 12:11 신고
  4. 미숙이  수정/삭제  댓글쓰기

    버리지 마세요.. 예쁘게 꾸며서 수납공간으로 이용하면서 가끔씩 어머니와 그 시절을 추억해 보세요.

    2009.09.11 12:55
  5. 오픈타운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집에는 제가 가장 아끼는 전자제품중에. 1992년 3월에 삼성에서 나온 전자렌지를 하나 구입 했는데
    별 잔고장 없이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저와 함께 17년째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삼성 전자렌지
    이젠 친구처럼 다정한 연인 처럼 느껴집니다.

    2009.09.11 13:10
  6. Favicon of http://blog.daum.net/hyunphoto BlogIcon hyun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이 들대로 들었겠군요.
    어머님의 마음이 담긴 냉장고 오래 간직하고 계셨군요..^^

    2009.09.11 13:12
  7. Favicon of https://sapzzil.kr BlogIcon sapzzil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알뜰하게도 오래 쓰셨네요...어머님께서도 바꿔주고 싶으셨을 거에요~~

    2009.09.11 13:31 신고
  8. Favicon of https://oravy.tistory.com BlogIcon 하수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든 물건 선뜻 버리기가 쉽지가 않죠.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2009.09.11 13:33 신고
  9. Favicon of http://mayjhkim.tistory.com BlogIcon 바람꽃과 솔나리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냉장고군요...
    요즘 보기 힘든 냉장고인데 잘 쓰셨군요..
    어머님도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2009.09.11 13:38
  10. 심규덕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슴따뜻합니다..
    언제나 들어도 뭉클한 어머니...
    정말 부모님께 계실때 효도 잘 해드려야 되는데...
    전 그러한 아들인지 모르겠네요....

    2009.09.11 13:58
  11. Favicon of http://djtlsfudnf.tistory.com BlogIcon 어신려울  수정/삭제  댓글쓰기

    몇년만 더쓰면 골동품되겠는걸요.ㅎㅎ
    보아하나 삼성전자 제품인것 같은데..
    이정도 썻으면 삼성전자에서 교환 정도는 해주어야 되는거 아닙니까?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삼성 이건희 씨에거 전화한통 넣어 볼께요 ㅋㅋㅋ

    2009.09.11 14:02 신고
  12. Favicon of http://blog.daum.net/kan7ry BlogIcon kan7ry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머님의 사랑이 녹아 있던 냉장고 .
    이제는 그사랑을 내리사랑으로 답하실 나이신군요..
    따뜻한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2009.09.11 14:33
  13. Favicon of http://hyoya.tistory.com BlogIcon 빛으로™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감동의 글 잘 읽었습니다

    2009.09.11 14:49 신고
  14. 미래로  수정/삭제  댓글쓰기

    버리지 마셔요...
    무언가 매개가 있다는 것은 참 좋은것 같습니다.
    어머니라면 더욱이요...
    저도 엄마생전에 세뱃돈을 달라고 떼써서 받았는데
    그게 마지막 세뱃돈이 되어서 지금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답니다.볼때마다 그리움이....

    2009.09.11 15:19
  15. Favicon of https://rubygarden.tistory.com BlogIcon 루비™  수정/삭제  댓글쓰기

    귀한 냉장고...
    어머니의 손때가 묻어 있는 물건인데...
    이별하시기가 아쉽겠어요.

    2009.09.11 15:57 신고
  16. Favicon of https://tirun.tistory.com BlogIcon 티런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정말 귀한것이네요.
    파르르님 이런모습보면 참 존경스럽습니다~

    2009.09.11 18:59 신고
  17. Favicon of https://bluebus.tistory.com BlogIcon 느릿느릿느릿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 집에도 제가 태어날때부터 20년 가까이 사용한 세탁기가 있었습니다.
    대기업 모사 제품인데.. 별다른 고장없이 쓰다보니 바꿀 생각을 안했는데...
    막상 버릴때가 되니 안타깝더라구요.
    꼭 생명이 있는 것만 사라질때 맘아픈 건 아닌가봅니다.

    2009.09.11 19:05 신고
  18. Favicon of http://blog.daum.net/doong2009 BlogIcon 둥둥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것만 찾는 요즘에 저런 귀한 물건이 있었네요..
    가슴이 찡합니다 잘봤습니다

    다음주를 위한 재충전이 되어줄 주말이네요
    선선한 바람과 함께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2009.09.11 22:32
  19. Favicon of http://lovetree0602.tistory.com BlogIcon 초록누리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 버리셔도 어머니도 하늘에서 다 아실거에요.
    그동안 어머니 마음 헤아리고 잘 사용해 온 것으로도....

    2009.09.12 00:16 신고
  20. Favicon of http://dreamnet21.tistory.com BlogIcon 김명곤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머니의 정이 묻은 냉장고....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정이 절절히 묻어나는 글이군요.
    이 글을 읽으며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 생각에 한동안 잠겼답니다.

    2009.09.12 07:50 신고
  21. Favicon of https://giga771.tistory.com BlogIcon sky~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장모님 세탁기가 오래됐었는데 이번에 바꿔드렸습니다. ^^

    2009.09.12 07:5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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