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는 놔두고 현금만 빼가는 이유는 뭘까
지독한 한파가 몰아친 주말이었습니다. 눈이 내리면 눈썰매를 타러 가자고 벼르던 애들도 바깥날씨를 보고는 엄두가 나질 않았나 봅니다. 잠시 차를 몰고 나갔다가 포기하고는 그냥 집에 돌아올 정도였습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아들과 함께 목욕탕이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그것마저도 귀찮더군요. 강추위가 한풀 꺾인 어제서야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다녀왔습니다.
전날 야근을 한 상태라 충분히 잠을 잔 후 느긋하게 눈을 떠 아들과 함께 들어선 사우나, 하루 전에 기세등등하던 강추위는 간데없고 비교적 쾌청한 날씨를 보입니다. 아주 기분 좋게 아들과 함께 서로 등을 밀어주고 할 때만 해도 잠시 후에 일어날 일은 예상하질 못했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나면 갈증이 나게 마련입니다. 아들 녀석도 목욕을 마친 후에 좋아하는 음료수를 사서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냉장고에서 두 개의 음료수를 골라 꺼내고는 요금을 지불하고 난후 나머지의 돈 봉투를 락커에 넣어둔 채 휴게실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하였습니다.
목욕탕에 가면서 웬 돈 봉투냐구요? 며칠 전 크리스마스 때 아내의 선물을 따로 준비하질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무엇을 사야할지 몰라 미루다보니 늦어 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봉투에 10만원을 넣어 사고 싶은 것을 사라고 전해주었습니다. 오히려 아내는 이렇게 돈 봉투를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설픈 선물보다는 직접 맘에 드는 것을 고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마침 목욕을 나오면서 목욕비로 2만원만 달라고 했던 것이 아내는 우선 쓰다가 나머지 갖고 오라며 급한 데로 며칠 전 받아 두었던 돈 봉투를 그대로 전해줬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 봉투에 들어 있던 소중한 현금이 잠깐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둘의 목욕비를 지불하고 음료수를 사먹은 나머지 약 9만원이 들어 있던 돈 봉투입니다. 음료수를 사고 나서 락커에 넣어두면서 문을 잠그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돈 봉투는 그대로 놔두고 안에 들어 있던 현금만 쏙 빼갔다는 사실입니다. 기가차서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그리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휴게실에서 음료수를 마신 시간도 불과 10분이 채 되질 않습니다. 대범하게도 그사이에 돈을 털어갔습니다. 왜 돈을 털어가면서 봉투는 그대로 두고 갔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반사적으로 탈의실의 천정을 살피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지요. 목욕탕 탈의실에 CCTV가 설치되어 있을 리가 없겠지요. 바로 종업원에게 달려갔습니다. 얼핏 보니 아르바이트 생으로 보입니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난색을 표하면서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하지만 사장이라고 해서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완전 대낮에 두 눈 뜨고 코 베인 격입니다.
당장은 락커를 잠그지 않은 실수를 들어 목욕탕의 입장에서는 잘못이 없다는 눈치입니다. 정 억울하다면 경찰을 부르라는데, 그 참, 이 정도의 금액으로 경찰을 부르는 난리법석을 피우는 것도 참 우스워 보입니다. 억울하지만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아내에게 아직도 얘기를 꺼내질 못했는데,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분명 모든 화살은 나에게 돌아올 것이 뻔합니다. 얼른 돈 봉투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해 보입니다. 이거 완전 연말에 제대로 액땜하는데요....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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